“백년대계 생각해 심형기초 채택”

<지난호에 이어>
결국 중요한 제도의 도입에서 충분한 검토시간 없이 시작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던가 생각되었다. 또한 모든 사업 내용을 다 감리토록 해야 했으나 먼저 공사용 진입도로 개설을 위한 토목공사에는 시간상으로 전 구간 실시할 수 없었다. 감리 용역이 공사 보다 늦게 발주된 결과였다.

어쩔 수 없이 공사 품질이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진입도로 공사는 실제 전기 품질과는 관계가 없었기에 감리 대상에서 제외하고 감리 용역을 추진토록 조치하였다.

하나 걱정인 것은 감리제도 도입이 처음인 관계로 우리 한전 측도 정확한 추진 방법을 모르고 업체 역시 경험 부족이요, 감리업체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혹시 서로 책임의식 상 공사 시행 중 감리업체의 견제로 공사가 제대로 추진되지 않으면 그것 또한 큰 일 이었다.

도리 없이 이럴 경우 한전 측에서 적절히 현장지도 하기로 하였다. 발주자, 공사업체, 감리자 모두가 시공 및 현장 경험이 없기 때문에 객관성 확보가 상당한 문제로 대두될 전망이었다.

그래서 일본 동경전력의 협조를 얻어 중요공사 추진 포인트 등 현장 출장하여 조언을 구함이 좋겠다는 다수의 의견이 있었다. 동경전력은 우리 한전과 기술협력을 하기로 상호 협정은 되어 있긴 하였으나 단순히 협조를 얻어 업무 추진 등 책임의식이 없고 우리 또한 적극적인 도움을 얻기도 곤란한 것 같아 정식으로 용역 계약토록 업무를 추진하였다.

결과적으로 기초 굴착시, 철탑 조립시, 가선시 삼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별로 약 2주간씩 현장 입회토록 하였다. 그 결과는 우리도 상당한 도움을 얻었고 또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어 좋았다.

실 착공일은 1996년 2월경이었으나 실제 기공식은 1996년 5월 9일 시행하였다.

착공식 준비에도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을 뿐더러 각 곳에서 실제 사업 시작을 한 후에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장님을 모시고 착공식을 하고 싶었으나 민원을 자극하는 등의 문제도 있고 해서 부사장님을 모시고 하기로 하였다.

식장은 안성시 인근의 765KV 신서산 송전선로 4공구(삼성) 현장사무소 부지로 했으며 관련업체 대표, 인근 사업소장 등 많은 사람을 모시고 시행했으나 아쉬웠던 것은 민원 때문에 주위 행정관서와 언론사 등을 제외한 자체 행사로 치른 점이었다.

날씨는 좋았으나 봄바람이 하도 심하게 불어 식장에 세워 놓은 아치형 문이 식전날 넘어져 밤을 세워가며 세운 일을 나중에 알고 얼마나 실소했는지 몰랐다.

나 역시 Host로서 퍽 마음 조리며 식을 준비하고 진행시켜 왔는데 사전에 알았으면 마음만 조렸지 별 수 있었겠는가.

어차피 현장에 맡겨진 일이니 책임지고 현장에서 처리하겠다는 마음가짐 고마울 뿐이었다.
착공식은 오후 2시에 거행 했었는데 점심 식사 때는 인근 사업소장과 부사장님, 전무님, 본사 및 관련 주요 간부를 모시고 점심식사를 하는 등 식전 식후 행사 하나하나가 나로서는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칵테일파티, 현장 사업 설명회, 또 지역 행사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던지….

그 외에는 기공식을 큰 문제없이 잘 치러서 퍽 기뻤다. 큰 행사의 잔치 준비를 하고 이를 잘 치러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한 행사였다.

착공과 더불어 처음 떠오른 기술적 문제가 철탑 기초의 형식 문제였다.

설계는 역T형 등 재래식 기초 방식이었는데 토건부서에서 심형기초 방식의 채택건의가 있었다.

환경훼손을 줄이고 기초강도도 좋아지나 문제는 공사비가 삭감되어 업체의 부정적 시각이 만만찮았다.

심형기초 굴착을 위해서 새로운 굴착장비의 매수 등을 이유로 반대가 심하였다.

백년대계를 생각해서 과감히 심형기초를 채택 시행하였다. 업체는 처음에 크게 반대를 했지만 결국 동의하고 본사, 정부 모두가 잘 선택된 기초 방식으로 인정해 주어 크게 만족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민원이 대단하였다.

정선군 군의회 의원 7~8명이 해당지역 국회의원 보좌관과 같이 직접 처장실을 찾아 온갖 폭언을 하면서 민원을 제기할 때엔 정말 기가 막혔다.

참고 참아 달래면서 겨우 넘어갈 수 있었다.

왜 서울, 경인 지역의 전력공급 때문에 자기 지방이 피해를 보아야 하는 가라는 논리였다. 일리가 있는 민원은 지역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선로를 변경하고 지역 협력도 충분히 하도록 하였다.

나 자신 기술부장 재직 시부터 송전선로 등 전력시설의 국토 이용을 악지(惡地) 위주로 함이 돈이 비록 많이 들더라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좁은 국토에 토지의 이용가치는 많기 때문에 전력시설은 기술적으로 가능만 하다면 비록 경제성은 좀 떨어지더라도 악지 선택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고, 765kV 시설 건설 시에도 이 원칙을 고수하였으며 불가피 할 때에는 해당 지역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이에 따른 지주에 대한 보상이나 지역 전체의 협력 사업의 시행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철탑의 부속 장치인 승강기나 Rail 선택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품질이 제일 우선시 되는 사항이었기 때문에 충분한 기술력 확보를 최우선 한다는 원칙 하에 이를 선정 시행하였다.

건설 초기에는 모든 것이 처음이기 때문에 전문가가 없어 어디에다 조언을 구할 데도 없고 조그만 시공의 어려움이나 기술적 선택의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정말 난감한 적도 있었지만 관계 서적이나 관련자 모두가 머리를 모아서 결정하였고 또한 일본 시공 경험자들의 조언도 큰 도움이 된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몇 군데 진입도로가 완성되고 철탑 기초가 되고 철탑 부재들이 들어가면서 한가지한가지 되어 가기 시작했다.

산악지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한 운반 방법으로 모노레일(monorail) 방식을 연구원 중심으로 실증시험도 해 보고 현장에 설치도 해 보는 등 여러 가지 노력도 하였다.

솔직히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자연 훼손을 최소화함은 나의 소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여러 회사가 같이 시공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 기술 정보를 교환하여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996년은 조직이 겨우 제 자리를 잡기도 전에 공사도 시작되고 모든 것이 처음인 상태에서 공사가 진행되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제자리를 잡아 나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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