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는 인터넷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국민 모두에게 실감하게 해 준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월드컵의 시청 앞 붉은 파도와 광화문의 촛불의 물결, 대선의 노란색 돌풍도 모두 인터넷이 그 진원지였다. 이만하면 한국을 움직이는 파워집단 서열 중 윗자리 하나는 인터넷의 몫으로 비워놓아야 할 것이다.

상황 하나

얼마 전 발표된 인터넷 사이트 순위에서 전세계 500대 사이트 중 한국 사이트가 133개로 전체의 26.6%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은 세계 3위를 차지했으며 세이클럽은 10위, 벅스뮤직이 13위, 넷마블 16위, 프리챌이 17위로 20위권 안에 한국 사이트가 5개나 됐다. 이밖에 경매 사이트인 옥션이 32위, 네이트닷컴이 38위, 마이클럽이 271위를 차지하며 인터넷 강국인 한국의 위상을 또 한번 세계에 떨쳤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 패러디 신문인 딴지일보는 방문자 수 1억명을 돌파하며 엽기 등의 유행을 창조하면서 사회적 금기에 도전했고, 인터넷신문인 오마이뉴스는 주류 언론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시민기자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해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 중 하나로 올라섰다.

특히 10대에서 30대까지의 의사소통수단은 인터넷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월드컵 때 모여든 수백만의 야외응원단도 인터넷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아가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미선이·효순이를 추모하기 위해 시작된 촛불시위는 제안부터 논쟁, 방향설정 까지 모두 인터넷 안에서 이루어져 그 열기가 오프라인으로 번진 새로운 운동방식이었다.

인터넷은 더 이상 어린 아이들의 놀이 도구가 아니다. 누구보다 인터넷의 힘을 실감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주요 인선을 인터넷의 추천을 받아 결정한다고 밝혀 인터넷은 권력을 창조해내는 도구로까지 자리매김했다.

인터넷의 특징은 익명성과 함께 실시간성·쌍방향성에 있다. 방금 일어난 이슈에 수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공유하고 나름의 결론을 도출한다. 인터넷의 힘은 밀실 속 거래를 통한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소수의 기득권층이 정보를 독점하고 소수의 힘있는 자들이 여론을 조작하거나 거짓 논리를 양산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됐다.


상황 둘

대선이 끝나고 50대 이상의 장년층은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너무도 급격한 사회변화에 적응하기 힘들고, 젊은층이 열광하는 새로운 가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은 푸념과 공격의 대상을 인터넷에 집중했다.

그들에게 인터넷은 괴물이고, 그들을 사회에서 몰아내는 차별의 도구이다. 직장에선 컴퓨터를 보고 있는 젊은 직원이 과연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메신저로 다른 동료와 자신의 흉을 보고 있는 건지 구별할 수 없게 됐고, 촛불시위로 인해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조심스레 자녀에게 충고라도 할라치면 자녀들은 어느새 인터넷으로 무장된 정보와 논리로 자신을 퇴물 취급해버린다.

대선기간 중 한 거대 언론사는 자신들에게 비판적이던 인터넷 언론에 대해 공격의 포화를 퍼붓고 인터넷 포퓰리즘의 등장을 경계했다. 과거 냉소하며 애써 무시하던 태도에 비춰 볼 때 이는 위기감의 발로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후 일부에서는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이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음모였다는 자조섞인 농담도 회자되고 있다.

지금도 보수층과 장년층에서는 인터넷의 부작용을 막아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하지만 그 소리는 이미 인터넷에 익숙하고 인터넷을 통한 의제 형성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젊은층에게 묻혀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사그러들고 있다.


인터넷이 사회의 주류를 결정하고, 이념과 세대를 갈라놓았다는 분석은 아직 이른 감이 없진 않다. 그러나 인터넷의 힘이 계속 커지고 세질 것이라는 전망에 고개를 저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은 ‘넷맹’이라 불리며 과거 문맹자처럼 소외된 계층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보수의 대변자임을 자처하는 조갑제씨의 “보수세력이 인터넷을 장악해야 한다”는 단발마의 비명은 설득력을 갖는다. 과연 인터넷은 80년대의 '광장'을 이어 한국사회의 헤게모니 쟁탈전의 무대가 될 것인가. 지금의 추세로선 ‘그럴 것이다’라는 답변에 더 무게가 실린다.

200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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