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 모두가 모여서 딱 한 장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졸업 사진 촬영은 끝났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그나마 없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것은 그날의 추억뿐이다. 나는 수학여행을 못 간 것처럼 졸업 사진도 찾지 못했다.”
“서울에 와 일하면서는 내 공장을 차릴 수 있겠다는 희망이 더 강해졌다. 난 양철 지붕 아래에서 차가운 잠을 자면서도, 밥을 변변히 먹지 못해 배고 고플 때도,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보고 싶어도 내려가 보지 못할 때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생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후, 난 그 희망을 이뤘다.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이 들어서 매일 새벽에 학원에 나가 앉아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의지로는 견디기 힘들다. 그럼에도 검정고시를 패스해 50이 넘은 나이에 대학까지 간 것은 ‘이재창이가 대학생이 된다’는 희망 덕분이었다.”
- 『단돈 500원으로 이룬 나의 꿈 나의 성공』(이재창 著) 본문 중에서

“이재창은 신화다. 그의 삶 자체가 신화다. 간혹 어려운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아까운 재능을 썩히려는 청소년을 만날 때면 나는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 내어 당당히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때 내가 가장 자주 예로 드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재창이다. 그의 신화가 용기와 투혼의 샘이 되기 때문이다.”
- 한나라당 홍사덕 국회의원

1950년대.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가난이라는 싹이 자랐다. 그리고 그 때나 지금이나 가난은 참으로 삶을 힘들게 한다. 당시 사람들은 지독한 가난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가난이란 싹을 싹둑 자르고 ‘희망’이라는 씨앗을 다시 뿌린 이들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 젊은 세대들은 그들의 뿌린 씨앗이 자란 커다란 나무의 그늘에서 생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 ‘희망’이라는 씨앗을 지금도 곳곳에 뿌리고 있는 이가 있다. 바로 태양트레이(주)의 이재창 회장.
그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고, 졸업과 동시에 교과서 대신 용접봉을 잡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돈을 벌기 위해 산속을 헤매며, 말라서 땅에 떨어진 솔잎, 즉 솔가리 (당시 지역에서는 ‘갈비’라 불렀다고 한다)를 모으던 경북 영주 산골의 ‘갈비 대장’ 이재창 회장은 예나 지금이나 가슴속에 ‘희망’을 품고 있고, 또 그 ‘희망’을 자신만이 아닌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그리고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살아온 덕분에, 홍사덕 국회의원이 그의 삶 자체를 ‘신화’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는 성공을 일궈냈다. 이번 리더스클럽 시간에는 국내 케이블트레이의 창시격인 태양트레이의 대표이사로서, 지역에 봉사하고자 시작한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삶을 돌아보고, 또 지금 그의 가슴엔 어떤 ‘희망’을 품고 있는지 들어봤다. 

교과서 대신 잡은 용접봉
태양트레이 이재창 회장은 1949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두 살때부터 영주에서 자랐다. 어려서 산골을 뛰어다닌 그라 그 동네에서는 뜀박질로 그를 따라잡을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양조장에서 술을 배달하는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자신을 앞지르는 모습을 보고는, 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에 양조장에서 일하겠다고 어머니를 졸라보기고 했다고.

“그 때 어머니께서 읍내에 있는 자전거 고치고 구루마 고치고 하는 집에서 기술 한 번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어요. 거기서 일하면 밥은 먹여 준다 하면서. 저는 바로 대답했죠. 거기 가면 땜질(용접)하는 기술을 배울 수가 있었거든요.”

이렇게 용접기만 몇 개 있는 아주 작은 점포에서 이 회장의 첫 직장 생활은 시작됐다. 당시 자전거와 리어커는 모두 이 회장이 때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영주에 철로가 놓이게 됐는데, 마침 우리 가게가 철도역 수도공사를 서울 회사에서 하청을 따내 맡게 됐어요. 급수 배관 공사는 수압에 견뎌야 해 용접공 실력이 시원찮으면 어딘가 새는 곳이 꼭 생기게 됩니다. 서울 사장님이 그러더군요. 이 일만 잘하면 서울로 취직시켜 준다고….”

이 회장은 수도 배관공사에 승부를 걸었고, 다행히 이 회장이 작업한 배관에서는 물이 새지 않았다. 그의 실력에 반한 서울 사장은 몇 달 후 그를 서울로 불러 올렸다.

당시 이 회장이 손에 든 것은 단돈 500원. 그것도 기차표 내고, 서울와 청계천까지 차비 내고 나니 모두 사라져버렸다.

“정말 밤낮으로 일했어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월급엔 손도 대지 않고, 공장에서 나온 작업복 하나로 버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었어요. 몰골은 그래도 용접 실력만큼은 알아줬죠.”

월급통장이 불어나기 시작했을 무렵, 청계천에 있는 기술공과학원에 등록해 이론을 차근차근 배워나갔다고 한다. 그래도 실습은 강사는 뒤로하고, 모두 이 회장에게 와서 배웠다고.

서울 생활 5년째로 접어든 1969년. 이 회장에게는 일생일대의 전환기가 찾아온다. 1969년은 우리나라에서 기능올림픽대회가 열리는 해였다.

“학원과 청계천 사람들이 모두 기능올림픽대회에 한번 나가보라고 했습니다. 사실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 기술을 인증 받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도전해보기로 했죠.”

결과는 가스 용접 부문 금메달. 주위에선 청계천에서 용 났다고 야단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동안 이 회장의 노력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다. 이후 이 회장은 자신만의 공장을 차리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원가 절감은 마음가짐에서 시작
그리고 1972년. 이 회장의 나이 스물 여섯에 청계천에 자신의 공업사를 차렸다. 지금 태양트레이의 전신인 태양공업사가 그것이다. 물론 이 회장의 실력 탓에 일거리는 줄을 이었다.

“특히 미군 부대일을 할 때 케이블트레이를 비싸게 수입해 들여와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케이블트레이를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회장은 자신의 실력을 바탕으로 케이블트레이를 직접 제작, 공사를 수주해 진행하기 시작했다. 유명 호텔을 시작으로 제철소 등에 쉼없이 제작, 남품했다. 그러던 중 박정희 대통령 시절, 시내에 있는 공장을 경기도로 옮기라는 정책이 발표되면서 이 회장은 김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관공서, 발전소, 제철소, 반도체공장 등에 케이블트레이, 덕트 등을 공급하며 업계 1인자로 올라서게 된다.

40여년이 흐른 2011년 현재 태양트레이는 고정 거래처만 수백개에 이른다. 그만큼 품질 및 신용이 좋다는 얘기다. 공장 내부에만 들어서도 알 수 있다. 제작에 필요한 기계의 경우 없는 게 없다. 즉 국내에서 생산 가능한 모든 케이스의 케이블트레이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특히 모든 공정을 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기도 한다.

또 기계가 모두 두 대씩이다.

“하나가 고장 나면, 하나를 돌려 납품 기일을 맞춰야지요. 아울러 모든 제품에 대해서는 일일이 확인을 다 거친 후 출하되기 때문에 거래처의 신뢰를 살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재고를 공장 가득 쌓아 놓고 있다.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바로 제작, 납품하기 위해서란다. 특히 짜투리를 버리는 일이 없는데, 1~2개씩 찾는 소량 고객들을 위한 조치다.

그러나 최근 계속되는 경기불황으로 태양트레이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에 원가 절감 노력이 한창이다. 무엇보다 이 회장이 솔선수범하고 있다.

“일이 없으니 동종 업계간 경쟁이 치열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가격이 내려가게 됩니다. 그럼 제품 원가를 줄어야 하는데, 우리가 줄일 수 있는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자세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자동차부터 줄였습니다.”

회장의 이런 모습에 직원들도 당연히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것도 시늉이 아닌 진심으로 말이다. 또 이 회장은 기술개발에도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좀더 새롭고 사용이 편리한 아이템을 개발 완료해 연말 쯤 출시 예정이라고 한다.

‘정치’는 ‘권력’이 아니라 ‘봉사’
한편 이 회장을 이야기하면서 ‘정치’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런데 남들은 ‘정치’를 ‘권력’으로 비유하지만, 이 회장은 다른다. 이 회장에게 있어 ‘정치’는 곧 ‘봉사’다. 자신이 어렵게 살았기에 불우한 이웃을 위해, 또 자신이 배우지 못했기에 가난에 학업을 포기하려는 청소년들을 위해 진정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고 한다.

1980년대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이 회장은 봉사 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991년 주위의 권유로 강남구의회 의원에 출마했고, 무투표로 당선됐다.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봉사하기보다는 제도권에 들어가면 보다 체계적이고 적극적으로 봉사할 수 있겠다는 판단에 생각을 바꿨죠.”

그리고 강남구의회 의원으로 이 회장이 가장 처음 한 일은 바로 보안등 교체사업이었다.

“처음 4년간은 정말 보안등만 했어요. 일단 환하면 범죄를 그만큼 줄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높은 사람 집 앞에나 보안등이 설치돼 일반 서민들이 다니는 골목은 어두컴컴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민주주의고, 정의인가 생각이 들어 골목골목 보안등 설치에 나서게 됐습니다. 또 당시 보안등의 경우 수동이었는데, 자동점멸기로 바꾸는 작업도 같이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이 회장의 활동에 지역주민들은 찬사를 보냈고, 그는 1대부터 4대까지 최고 득표로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다.

사실 이처럼 이 회장이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가족들의 힘이 컸다. 아무래도 회사 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데, 이 모든 것을 그의 부인이 도맡아 꾸려왔다. 슬하에 2남1녀를 두고 있지만, 그 누구의 졸업식에도 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의 봉사 활동을 이해해 주는 가족들이 있어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

그리고 이 회장은 앞으로도 힘닿는 한,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주민으로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 자신의 품에 안고 있는 ‘희망’이다.

“사람에게 희망이 없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곧 좌절감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할 것이다. 나는 하룻 있다’라는 희망만 있다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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