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진 나눠 美·日 등 출장 시행”

<지난호에 이어>

1994년. 벌써 내가 본사 격상추진반장으로 온지 3년째가 되었다. 작년에는 우리 격상사업과는 관련이 없지만 우리 송변전부서로서는 엄청난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는 국가적인 대형사고로 전체 한국전력의 운명이 걸린 사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남 구포지역에서 우리 한전의 지중 관로의 매몰로 열차의 전복사고가 발생 수십명의 인명이 죽고 또 수십명의 인원이 크게 다치는 엄청난 사고가 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우리 회사의 송변전 관련 지도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기술 부사장으로 계시던 이동호 씨와 김종채 사업단장이 용퇴를 하고 새로이 노환영 송변전 처장이 사업단장이 되었으나 그 자신 구포 사건에 일발의 도덕적 책임을 느끼고 있었고, 신임 이종훈 사장이(전임 안병화 사장의 자연스런 임기종료로 부임) 사고에 따른 영향인지는 몰라도 송변전 분야에 대한 불신으로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일이 많아 사업단장 취임 2개월이 채 되지 않아 사임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박태수 송변전건설처장이 전무로 취임하고 오영수 씨가 송변전처장을 맡게 되었었다. 이 때 송변전 건설 분야가 독립 송변전건설실(처 발족 대비 단계)이 되고 1직급 실장으로 박희열 씨가 맡게 되었고 우리 격상추진반은 이에 소속되었다.

몇 개월 뒤 다시 박희열 씨가 송변전건설사업소장을 맡게 됨에 따라 김태성 씨가 1직급으로 승진 송변전건설실장으로 부임, 명실상부한 조직 운용이 시작되었으나 조직 체계상 송변전처에 예속 되어 있어 조직 활성화에 약간의 장애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상의 변화와 인적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업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여러 가지 기술 표준은 물론 설계를 위한 각종 작업공량도 예비적이지만 만들어졌다. 연구원의 시험선로 건설 내용을 참조하였다.

건설을 위한 설계와 이를 직접 수행할 조직을 성안하여 조직부서와 열심히 협의, 765kV건설처(본부)와 예하 사업소(중부와 동부)를 1995년 1월에 발족토록 협의 완료하였다.

1994년에는 이미 계획한대로 미국 PTI에 4직급과 직원 수명을 3개월간 기술훈련 하였고 상위급 출장도 시행하였다. 1진은 내가 인솔 책임자로 변강 부장, 이석규 부장, 김재영 과장 등 4명이 미국과 캐나다를, 2진은 하충근, 구본묵, 박광희 부장 등이 일본과 남아연방을 출장하였다. 1진은 종합 기술 중심으로, 2진은 실제 송전선로가 건설되어 있거나 실제 공사 중인 일본과 남아연방을 송전 직군으로 구성하였었다.

특히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한 나는 비록 설비 자체가 1회선 철탑이어서 우리 설비와는 차이가 있었으나 설비 운영상의 문제점이나 변전 분야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 받았다.

하나 특기할 것은 미국의 New York Power Authority를 방문(친구 한일택 군의 도움으로 자세하게 견학할 수 있어 무척 도움이 되었다. 그는 1976년에 도미 NPA에 근무하고 있다)하고 캐나다의 Hydro 퀘백社를 방문했는데 두 회사의 설비 운영 방법이 판이하였다.

미국은 아웃소싱 위주로 회사를 운영, 관련 인원이 극히 적었고(발전 및 송변전 관련 인원 전체가 본사에 20여명 정도 근무), 반대로 하이드로 퀘백은 모든 걸 자체에서 연구 설계하는 식이었다.

서로간의 philosophy의 차이로 볼 수밖에 없으나 대부분 아웃소싱에 의존하는 미국 스타일이 더욱 바람직스럽게 느껴졌었는데 역시 그 후 세계적 추세는 물론 우리나라 각 분야에서도, 우리 회사에서도 아웃소싱이 대 유행 되었고 더욱 확대되어 나갈 것이 아닌가 전망되어 진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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